“장애학생은 소풍 가려면 각서 써라”
학교측 안전사고 책임회피 각서요구 ‘여전’
학부모들,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 시급”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06-03-15 17:52:48

▲지난 13일 국가인권위원회 정문 앞에서 장애인이 동등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각종 지원을 담은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는 학부모들. <에이블뉴스>

관련기사

서울의 K초등학교 특수학급 소속 장애학생들의 어머니들은 수련회를 앞두고 ‘이제 우리 아이도 참여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들떠있었다. 특수교육보조원이 배치되고 나서 첫 수련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장은 특수학급 학생들의 경우에만 학부모들에게 ‘만일에 발생할 모든 사고에 대한 책임을 학교 측에 묻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요구했다. 학부모들도 직접 참가해야한다는 조건도 걸었다.

특수학급 교사와 학부모들은 ‘특수교육보조원이 배치됐으니까 함께 갈 수 있지 않느냐’고 항의했지만, 학교측에서는 ‘특수교육보조원의 경우 사고가 일어났을 때 책임을 물을 수 없고, 출장비등의 지급관계도 복잡해서 따라갈 수 없다’고 답변했다.

이 문제를 지역교육청에 알렸더니 담당 장학사는 ‘이러한 부분은 학교장 재량사항이기 때문에 교육청은 아무런 입장이 없다’고 외면했다.

수련회 떠날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 있는 서울의 M초등학교 운동장 한쪽에서 5학년 부장교사와 장애학생의 어머니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바로 부장교사가 ‘수련회에 아이를 못 데려 가겠다’고 말하자 어머니가 항의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 어머니는 이날 아침 ‘부주의로 인한 책임을 학교측에 묻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요구받아 이미 써준 터였다. 기분은 나빴지만 아이가 수련회를 간다고 며칠 전부터 들떠 있던 아이를 생각해 어쩔 수 없이 각서를 썼다.

아이가 언어장애가 있어 특수교사가 수련회에 동행하기로 자정했고, 특수학급이 2개 있어서 학교에 남는 다른 특수교사가 따라가지 못하는 장애학생들을 교육하기로 했다. 그나마 이것도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다.

학교장이 특수교사가 수련회를 따라 간다면 나머지 아이들의 교육문제는 어떻게 하느냐며 거절한 것을 이 어머니가 싸우다 시피해서 얻어낸 것이다. 그런데 당일 날 상황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각서까지 썼고, 버스만 타면 되는 상황인데 부장교사가 ‘장애학생은 못 데려 간다’고 태클을 걸어온 것이다.

이 어머니는 부장교사와 교감에게 운동장에서 따졌고, 그 광경을 다른 교사, 학부모, 학생들이 보게 됐다. 교장실에 쫓아가서 거세게 항의한 끝에 결국 데려가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졌고, 부장교사도 사과했지만 이미 상처를 받은 어머니는 이 사과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는 전국장애인교육권연대가 지난 2004년 6월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발표한 장애인교육 현장에서 실제 발생한 각종 차별사례들 중의 일부이다. 이미 2년도 훨씬 지난 일들이지만, 아직도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수없이 쏟아져나고 있다. 수련회, 소풍, 현장학습, 사생대회 등 각종 학교행사에서 장애를 이유로 배제되는 차별 현실은 아직도 그대로다.

지난 2월 서울지역 R중학교 특수학급 학생들의 예비소집일이 있던 날이었다. 해당학급 특수교사가 학부모들에게 ''학교 행사에 참여할 경우 만일에 발생하는 안전사고에 대해 학교와 교사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내용의 동의서를 작성하라고 요구했다.

지난 3월 초 서울의 D고등학교 특수학급에서도 거의 비슷한 일이 있었다. 특수교사가 ‘학교 전체 행사에 참여했을 경우 안전사고에 관한 책임은 학교와 교사에게 묻지 않는다’는 비슷한 내용의 동의서를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그 다음날까지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일부 부모들이 ‘왜 우리 아이들만 동의서를 써야 하느냐’며 들고 일어섰고, 양쪽 학교 측에서는 모두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이미 동의서를 작성한 부모들에게는 동의서를 나눠주며 집에 가서 찢어버리라고 했다는 것.

울산장애인부모회 김옥진 회장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도록 소풍한번 못 가본 장애학생이 6학년 때 학교 측의 배려로 처음으로 소풍을 가게 됐고, 이 이야기를 수기로 써서 상을 받았다는 사례도 있다”면서 “요즘 교육권연대의 활동으로 줄고 있지만 거의 모든 학교에서 동의서를 가장한 각서를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서울장애인교육권연대 김경애 공동대표는 “안전사고와 관련한 각종 형태의 각서는 학교장등 학교구성원들이 장애학생이 학교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는 인식과 이해가 부족하고, 장애학생과 관련한 모든 책임은 특수교사 1명에게만 떠맡기고 있는 현실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장애인교육지원법에는 장애학생의 학교 내에서의 학습·일상생활등을 지원하는 보조원 도입을 의무화하고 있고, 교원들이 자질향상을 위한 연수를 의무적으로 받도록 하고 있다”면서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이 꼭 이뤄져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전국장애인교육권연대 소속 31명의 학부모, 교사 등은 지난 13일부터 국가인권위원회 11층 배움터를 점거하고,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촉구하는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공동 결의문을 통해 “내 아이가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면 목숨까지 걸겠다”고 선언했다.